한국농아인협회는 수년 전부터 방송통신위원회와 시청자미디어재단에 농인의 정보접근권이 단지 형식적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그러나 두 기관은 지금까지도 뚜렷한 개선 의지를 보이지 않은 채, 여전히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농인이 방송 내 수어통역과 자막방송의 ‘질적 향상’을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불편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인권 기준에 부합하는 정당한 권리 요구이자 공공 정책의 당위이기도 하다. 실제로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2014년과 2022년,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 방송 접근과 관련한 정책이 수어방송과 자막방송의 '양적 확대'에만 치우쳐 있으며, 질적 수준과 실질적인 접근성은 부족하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지적했다. 이에 따라 위원회는 '품질 향상'을 중심으로 실효성 있는 정책 개선을 강력하게 권고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통신위원회와 시청자미디어재단은 여전히 ‘양적 지표 중심’의 정책 기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피해는 전국 42만여 명의 농인이 고스란히 감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방송 접근권 개선은 단순한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농인 당사자가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수준의 질적 개선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때문에 현행 정책의 근본적인 전환이 요구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공기관의 행보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 지난 2월, 개최된 사단법인 한국수어통역사협회 정기총회에 시청자미디어재단 소속 직원이 참석해 ‘공로패’를 수상한 것이다. 사단법인 한국수어통역사협회는 수어통역사의 권익을 옹호하고 수어통역사의 저변 확대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다. 그렇다면 시청자미디어재단 소속 직원은 과연 어떤 공로로, 누구를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수상의 주인공이 되었단 말인가?
방송 통역 현장의 수어통역 품질은 여전히 형편없고, 자막 오류는 빈번하며, 농인의 방송 접근성은 수년째 정체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의 시청자미디어재단 소속 직원의 공로패 수상은 농인을 기만하는 일이자, 방송접근권 개선을 요구해 온 당사자들의 절박한 외침을 외면하는 무책임한 처사이다. 특히 이 수상은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가 강조한 ‘질적 향상’이라는 핵심 권고를 무시한 채, 여전히 ‘양적 성과’ 중심의 인식을 드러낸 상징적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행보는 시청자미디어재단의 정책 방향과 기관의 역할 인식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시청자미디어재단은 농인을 포함한 모든 시청자의 방송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적 기관이며, 특히 농인의 정보 접근권 실현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최근 재단의 모습은 정작 권리의 당사자인 농인은 외면한 채, 수어통역사 집단의 권익을 우선시하는 데 치우친 것으로 비치고 있다. 이는 재단이 본연의 공적 책무를 망각한 채, 특정 직능단체와의 관계 유지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든다.
공공기관이 실질적 책임 이행보다 형식적인 ‘자화자찬식’ 행보에 몰두할 경우, 그 피해는 결국 정보 접근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농인들에게 전가된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농인들이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질 높은 수어통역과 정확한 자막 제공 체계를 구축하는 실질적 조치다.
2025. 5. 2.
(사) 한국농아인협회
※위 논평/성명은 각 기관의 알림자료로써 당사의 보도기사 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조시훈 기자 bokji@bokj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