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애 부끄러워한 가족 탓에 암울했던 어린시절 "제발 나를 부정하지 말아요"
PM 8:45
난 컴퓨터를 켜면 늘 그렇듯 메신저를 접속한다.
혹시나 말동무라도 있을까, 하고.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거의 장애인. 그 속에 나도 장애인.
가끔가다 친구추가가 들어오지만 장애인이라는 소심함에 선뜻 말 걸기가 힘들다.
그러다 대화가 들어오면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난 “장애인이에요”하고 말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미안합니다”하고 나가 버린다.
혹시라도 상대가 실망 할까봐 했던 게 역시나가 되어버린다.
예전 같으면 너무 우울했을 텐데 이젠 당연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괜찮아” 하며 나를 다독여본다.
하지만 나도 때론 비장애인친구를 만나고 싶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먼 이야기일까.
사람과 사람 사이가, 너무… 멀다….
-‘나도 때론 비장애인을 만나고 싶다’ 中, 김현실-
가족조차 외면한 ‘미운오리새끼’
날씨가 화창한 오후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만난 김현실(30·뇌병변 2급)씨는 흰색 정장 상의에 연두색 숄더백을 맨 다소곳한 모습이었다. 기자와의 인터뷰를 위해 단단히 신경 쓰고 왔다며 “어때요, 예뻐 보이나요?” 묻는 그에게서 본디 타고났을 밝고 명랑한 성격의 일면이 보였다.

햇살이 한가득 쏟아지는 대학로 거리.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의 활기가 좋다며 밝고 활기찬 사람들 속에 있으면 지니고 있는 장애도 한낱 작은 불만거리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말하는 현실 씨. 그는 걸을 때마다 몸이 한쪽으로 크게 기우는 하지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뇌병변에는 유전자이상이나 부모의 약물중독 등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월남전 참전 후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던 아버지의 영향이 아닐까 그는 짐작만 할 뿐이다.
“가족들은 늘 장애가 있는 날 부끄러워했어요. 고지식한 시골 농사꾼이었던 부모님은 저를 남들 앞에 내놓기 창피해 하셨지요. 여섯이나 되는 형제자매도 모두 마찬가지였어요. 재활용센터에 물건보관함, 미운오리새끼… 가족들 속에서 제 존재란 그런 것이었어요.”
1남6녀의 넷째로 태어났지만 집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죽어지내야만 했던 기억이 그에겐 지금까지 고통으로 남아있다. 몸이 약해 힘든 밭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긴긴 하루해가 넘어가는 동안 언제나 방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것 외엔 할 일도, 할줄 아는 일도 없었다던 그. 집에 손님이라도 오는 날엔 할아버지 방에 갇혀 쥐죽은 듯 숨어있어야 했던 어린시절은 그의 내면에 어둡고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기에 충분했다.
“나는 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왜 가족들은 내 장애를 떳떳이 인정하지 못하는 걸까. 가족들이 제 장애를 누구보다 이해해주길 바랐는데, 언제나 저를 가장 부끄러워하고 주눅 들게 했던 건 타인 보다 가족이었어요.”

현실씨는 사람 많은 곳의 활기를 좋아한다. 밝고 활기찬 사람들속에 있으면 지니고 있는 장애도 한낱 작은 불만거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떠올릴만한 따뜻한 기억이 없다.
다만 어릴 적, 아버지가 무척 아끼던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만 놀다 그 가지를 꺾어버리는 바람에 회초리로 몹시도 맞았다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무엇 때문에 그 나무를 그토록 아끼셨을까….
(중략)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참 많이 외로운 분이셨던 것 같다.
-06년, 아버지 제사를 앞두고-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는 현실 씨가 열두 살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실감 때문인지 어머니는 그를 더 매몰차게 대했다. 한창 예민한 나이의 딸아이를 쾌쾌한 할아버지의 구석방으로 귀향 보내 듯 내쫓았다. 그는 늙고 병든 할아버지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줄곧 한방생활을 해야 했다. 그래도 그 집에서 자신을 사랑으로 돌봐 준 사람은 할아버지 한 명 뿐이라며, 지금은 가고 없는 할아버지 생각에 눈시울을 붉혔다.
“제가 유일하게 애착을 갖고 있는 가족이 할아버지에요. 제 외로움을 유일하게 토닥여 준 분이셨어요. 앞장서서 제 편을 들어주시진 못했지만 늘 축 처진 제 기분을 풀어주려 애쓰셨는데…. 할아버지와 둘이 방에서 전축을 틀어놓고 듣는 음악 소리가 좋았어요. 잠이 안 올 땐 이것저것 옛날이야기도 들려주시고…. 방안에만 박혀 있는 저를 위해 가끔씩 아껴두었던 라면을 꺼내 끓여주곤 하셨어요.”
직장 때문에 스무 살 이후로는 줄곧 서울에서 떨어져 살았지만 할아버지만은 타지에서도 생각나는 유일한 혈육이었다는 현실 씨. 가족 중 누구하나 자신에게 사랑한다 소리 한번 해주지 않았다고, 세상 밖으로 끌어줄 누군가가 절실했지만 어느 누구도 도움의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사랑에 고픈 어린 얼굴이 엿보였다.
나를 위해 선택한 독립생활 “이제야 사는 것 같아”
서울에서의 직장생활도 수월하지는 못했다. 야물지 못한 손마디에 약간의 언어장애까지 있어 제조업도, 사무보조일도 쉽지가 않아 간신히 들어간 곳이 음식점 주방 보조. 다행히 맘씨 좋은 여사장을 만나 수양딸 소리를 들어가며 일을 했지만 그나마도 사정이 안 좋아져 일년 치 월급이 체불되어버렸다. 독하지 못한 마음에 무급으로 버텨낸 일년이 무색하게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할 수 없이 절차를 거쳐 간신히 밀린 월급의 일부를 찾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을 땐 사람도 신뢰도 모두 잃은 후였다.
체불금을 받기 위해 관공서를 수 십 번 오가는 사이 몸도 마음도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버렸다는 그는, 좀더 공부를 해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고 싶은 바람이 굴뚝같다.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돈을 벌어 사회복지사가 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맘 편히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못돼 순간순간 마음이 착 가라앉아 버리는 때도 많다….
어느 날의 가족 이야기
어제 간만에 친구들과 쇼핑을 했다.
서점에 가서 시험 볼 문제집과 동대문운동장 쇼핑코너에서 몇 가지 여름옷들…
정말 간만에 맘 놓고 산 것들이었다.
이제는 나도 백조가 됐으니 절약해서 아껴 쓰는데
울 못난 언니는 모른다.
옷과 책들을 가지고 들어오는 날 보더니
“돈 한번 못 버는 주제에 집에만 있는 니가 왜 옷이 필요하냐” 한다. 주제에 극장은 왜 가냐니….
사람들은 늘 내게 그런다, 언니가 너 데리고 사니 언니 말 잘 들어야 한다고.
성인이 되어서도 손찌검을 참아내야만 하는 심정을 그들은 알까….
(중략)
그래서 나는 늘 죄인으로 살아야 한다….
-05년 ‘가족이야기’ 中-
현실 씨는 지금 함께 살던 언니 집을 떠나 수유리에 혼자만의 작은 보금자리를 꾸렸다. 몇 년 간 자취생활을 하는 언니 집을 오가며 더부살이를 했지만, 서른이 된 나이에도 간섭받는 일이 많아 작년 말, 독립을 선포하고야 말았단다.
“어렸을 적 보다야 덜하지만 지금도 가족들은 저를 온전한 인격체로 바라봐주지 않아요. 함께 살면서도 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지 않죠. 네가 돈 쓸 일이 어디 있느냐, 뭘 안다고 말대답이냐, 왜 다시 직장을 구하지 않느냐…. 삼십년이 다 돼도 변함없이 목을 졸라 오는 그 말들이 싫었어요.”

화 한번 내지 못하고 스스로 번 돈 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했던 삶이 감옥과도 같아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을 탈탈 털어 월세방을 마련했다. 그나마 호적상 가족들과 분리돼 있어 기초수급 대상자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초라한 지하 단칸방이지만 혼자 사는 지금이 훨씬 마음 편하고 즐겁단다. 가족들 성화에 성인이 되어서도 외출 한번 마음대로 못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갈 수 있다며 미소를 보였다. 본디 웃고 살아야 할 사람의 환한 얼굴이 화사하게 드러났다. 없는 돈을 쪼개 문화생활도 즐기고 가끔 기차여행도 떠날 수 있어 이제야 좀 사람답게 사는 것 같다고.
“제가 원래는 많이 밝고 명랑한 성격이에요. 사교성도 좋고 추진력도 있어서 친구들 사이에선 나서는 일도 도맡고요. 아마도 우울한 성장과정만 아니라면 지금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돼있을지도 몰라요.”
환경이 어두울수록 오히려 자신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은 더해갔다고 말하는 현실 씨. AB형이라 그런지 직선적이고 자기주장도 강하며 때론 차갑다는 말까지 듣는단다. 어떤 때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을 좀 낮춰 생각해보라’는 겸양을 주문받기도 하지만, 장애인에게만 강요하는 ‘겸손의 미덕’이 실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 인터넷 카페와 개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자신이 느낀 감정과 생각을 글로 옮기는 걸 좋아해 이젠 아마추어 수필가가 다 됐다고 너스레도 떤다. 그가 올린 솔직담백한 글들은 호응이 좋아 자고 일어나면 댓글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다고.
“전 누가 제 이야기 들어주는 게 좋아요.”
언뜻 들으면 곱게 자란 공주님 같은 말처럼 들리겠지만 장애를 가진 채 살아온 오랜 시간 동안 가족조차 외면해 온 자신을 향한 연민의 발로라는 걸 안다면 누구나 절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게 가족과 학교와 직장생활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스스로 치유의 과정을 밟아 나가는 그만의 치료법 인지도 모를 일이다.
조금씩 천천히, 날기 위해 내딛는 걸음
어렸을 적 마당에서 언니와 동생들이 놀고 있었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지.
그런데 그 중 누가 잘못을 했는지 밭에서 엄마가 몽둥이를 들고 달려오는 거야.
그 모습에 다들 달아나는데, 나는 잘못한 것도 없고 도망갈라야 갈수도 없는 몸이라 그냥 남아 있었어….
그런데 엄마가 난데없이 나를 때리더라.
정말 어찌나 아프던지, 영문을 모르고 맞는 매라 더 서러웠던 기억이 나…(중략).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야,
엄마는 어쩌면 도망도 못가는 내 모습이 서러웠는지도 몰라….
그래서 그렇게 세게 나를 때렸는지도….
그렇게 푸닥거리라도 해야 조금 편해지는 심정, 뭐 그런 거 아니었을까…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줄 몰랐던 엄마가 말야….
-04년 어느 겨울-
세월이 흐른 지금, 부모에 대한 원망은 고개 하나를 넘어 마음속에 무거운 돌멩이처럼 가라앉아 있다. 사는 게 팍팍했던 시절, 어쩌면 처음 접한 딸아이의 장애가 부모에게는 낯설고 버거운 대상이었겠지, 애써 이해하려는 노력도 생겨났다.
“부모님이나 가족들 모두 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던 건 아닐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보려 노력하는 중이에요. 제 마음에 남은 상처는 아마도 앙금처럼 평생을 가겠지만 미움이 인생에 양약이 될 수 없으니, 서운함도 아픈 기억도 차차 잊어가는 훈련이 필요할 거 같아요.”
지금 고향집엔 자식을 다 떠나보낸 늙은 어머니만 남아 있다. 아직까지도 좀체 발길이 향해지지 않는 고향이지만 지난 5월엔 아버지 제사가 있어 모처럼 다녀오기도 했다. 가끔씩 힘없는 목소리로 걸려오는 어머니의 안부전화를 받는 날엔 뭐라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북받쳐 올라 당황하는 날도 있다. 단칸방에서 혼자 앓고 있던 어느 날, “꿈에 네가 아프더라, 어디 아픈 거 아니냐”며 홀연히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 한통에 목이 메었다던 현실 씨. 한때, 차라리 고아이기를 바랐을 정도로 부정하고 싶은 가족이었지만 끊을 수 없는 인연의 끈으로 묶여 있음을 그도 가족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타임캡슐이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던 현실 씨. 그러나 기자가 확인한 그는 세상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한 사람이었다. 그의 말처럼 한때는 미운오리새끼였는지 모르지만, 동화 속 미운오리새끼는 마침내 백조가 되어 하늘을 난다. 그러니 긴 터널을 빠져나온 그의 삶도 이제부터가 시작이라, 그리 믿는다. 긍정의 힘을 믿고, 지금처럼 자신을 사랑하면서 뒤돌아보지 말고 나간다면 어느 순간 그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늘을 날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글·사진/김혜경 기자
김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