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수 김한의원 원장
봉사의료인생 44년
저소득층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숨은 의료봉사를 꾸준히 실천하는 이가 있다. 바로 신림동 슈바이처라고 불리 우는 김연수(80) 김한의원 원장. 특유의 밝은 미소와 웃음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힘을 북돋아 주고, 아픈 곳을 쓰다듬어 주는 그의 선행이 담긴 손길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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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시절, 함께 정을 나누다
“제가 하는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한가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정을 나누고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사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말하는 김 원장은 1968년 철거민 정착촌 조성되던 지금의 신림동을 찾아 헌신하기 시작, 한의원을 개업한 이래 44년간 의료봉사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의료치유의 봉사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와주며 소신껏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라고 말한다.
김 원장은 꾸준히 신림동 지역에서 한의술을 통해 이웃을 돌봐 ‘신림동 슈바이처’로 통한다. 팔십의 나이에도 그는 현재까지도 하루 평균 10여명의 저소득층 환자를 무료 진료해 주고 있다.
그는 어렵고 가난하던 시절을 보내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김 원장이 중학생이던 시절, 6.25전쟁이 발발했고, 어린나이에 영문도 모른채 전장에 투입되어 하루하루 지옥 같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그는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와 한약방을 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아프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한의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경희대학교 한의학과를 지원, 졸업하게 되었다.
“옛날 신림동은 궁핍한 사람들이 서럽게 둥지를 튼 곳이었죠. 변변한 울타리도 없는 옹색한 살림살이를 살았던 환자의 집을 방문하다보면 항상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그때부터 그런 분들을 보면 진료비는 받지 않게 되었죠.”
김 원장은 누구보다도 어려운 사람들의 심정과 고충을 알았다. 함께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고, 힘든 경험을 겪었기 때문. 그는 가난해서 병원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돈 버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철거민 정착촌이어서 당시 깡패가 무성했었는데, 매번 저의 한의원도 방문해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었죠. 어느 무더위가 기승부리던 8월에 그 깡패가 새벽에 급하게 문을 두드려 부인과 찾아오더니 거품을 물던 자신의 딸아이를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애원하더군요. 순간 두려움도 앞섰지만, 침을 놓고 치료를 하니 다행히 아이가 호전되었고, 그 후 깡패는 감사하다며 다시는 전처럼 찾아와서 협박하거나 난동을 부리지 않더군요.”
얼떨결에 깡패 가족도 살린 김 원장은 가난하던 시절, 누구나 아픔이 있고, 서러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더 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노라고 다짐을 하게 되었다.

노력하는 신림동 슈바이처
“10명 중 3명에게만 치료비를 받아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무료 진료를 시작했지요.”
1977년에는 관악구청에 국내 최초로 ‘한방무료진료소’를 개설해 보다 체계적인 봉사활동을 펼쳤다. 처음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지만 나중엔 입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에서 화제가 됐다. 이후 진료소는 환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새통을 이뤘다. 그는 찾아오지 못하는 돈 없는 환자,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왕진가방을 들고 산동네를 누볐다.
그렇게 영세민 무료진료를 펼친 김 원장은 장학사업 등도 펼쳐 국민훈장 목련장(1981)과 동백장(1986)을 수여받아 의료봉사인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의사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질문을 제 자신에게 많이 했습니다. 의사도 봉사인이라는 답이 나왔습니다. 의료봉사를 끝까지 해서 돈이 없어 변변한 진료를 받지 못하는 많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을 보태줘야 겠다는 소명이 생겼습니다.”
김 원장은 한의원에서 일반환자도 진료하랴, 무료진료에도 힘쓰랴 바쁠 법도 하지만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게 즐겁고 보람된다고 말한다. 그의 손길이 닿은 이웃만도 지금까지 수십만 명에 달한다.
김 원장은 ‘후학’을 돕는 데도 적극적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고등학생 10명에게 매년 장학금을 주고 있다. 모교인 경희대에는 지금까지 총 5억2000여만 원을 장학금으로 지원했다. 김 원장은 장학금 주는 순위를 성적순이 아니라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우선으로 선정해 전달하고 있다. 그는 어렵게 보내던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당시 공부할 때만 해도 어렵더라도 미래가 보였는데 지금은 가난이 대물림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라며 배운 사람이 이웃의 가난의 사슬을 끊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경산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의학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 후에도 서울대와 연세대 중앙대 대학원을 다니며 한의학 공부를 계속했다. 지금도 관악구 학부모대학 학장을 맡고 있으며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외래교수로 강의를 나간다.
“학생들에게 열심히 살고 정직하게 살라는 말을 하며 가르치고 있죠. 열심히 살다 보면 부가 따라오고 돈을 벌면 남에게 봉사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장학금 줄 때는 학생들에게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라 빌려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중에 훌륭한 한의사가 되고 돈 많이 벌게 되면 후배들에게 똑같이 베풀어야 한다고 말하면서요.”

봉사의 가업을 잇다
김 원장 뿐만 아니라 김 원장의 가족 모두 의료봉사의 가업을 잇고 있어 사회의 모범이 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선행을 지켜본 자녀들은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이 당연히 어울리듯 김 원장의 뜻을 이어받아 국경을 넘나들며 아픈 사람들을 진료하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한의원에서 진료를 하고 있는 막내아들 김성준(48)씨와 사위 손영익(56·치과의사)씨는 매년 각각 동남아와 중앙아시아에서 무료봉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
장남 김용준(49·피부과의사), 딸 김현희(48·상담가) 씨도 함께 의료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 자녀들은 아버지인 김 원장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막내아들 성준이 같은 경우는 어린 시절 내가 하던 무료왕진을 따라다녔죠. 눈이 오는 겨울엔 연탄을 깨서 길에 뿌리고 신발에 새끼줄을 묶고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환자가 꼬깃꼬깃한 돈을 주면 고깃국이라도 끓여 드시라고 말했는데, 그때 성준이가 제 모습을 보고 꼭 한의사가 되겠다고 말했었죠.”
어린 시절 아버지의 무료왕진을 따라다녔던 김성준 씨는 지금 김한의원 부원장으로 아버지와 함께 일한다.
김 씨는 “부모님은 ‘생선 한 마리의 진리’를 생활신조로 삼았다. 생선의 먹기 좋은 몸통 부분은 가난한 이웃에게 주고 머리와 꼬리 부분으로 만족하는 삶을 사셨다”며 “부모님을 통해 삶과 의료봉사라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저도 선뜻 의대로 진학했다”라고 말했다.
김 원장의 가족 모두 지역주민을 돕는 무료진료봉사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수십 년 전 진료를 받은 뒤 돈이 없어 몰래 한의원을 빠져 나간 환자들이 뒤늦게 찾아와 진료비를 놓고 가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남은 인생도 봉사와 나눔의 끊을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의 꿈은 양, 한방을 혼합한 가족 의사들이 모여 하나의 큰 병원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더 나은 진료 혜택을 베푸는 것이다. 평생 남을 위해 살아왔기 때문일까, 꿈을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에선 아직도 20대 청년보다 활기찬 기운이 넘쳐 보인다.
신림동 슈바이처를 넘어 이 시대의 슈바이처로 우뚝 서버린 김연수 원장. 꼭 그의 꿈이 실현되어 이 사회를 지탱하는 든든한 밑거름으로서 당당한 한국의 슈바이처로의 모습이 지속되길 기대해본다.
문혜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