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계존(수원여자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 / 산성동복지회관 관장)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될 즈음인 90년대 초반의 기억이다. 펜글씨로 족보를 정리하던 아버지에게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로 작업을 하면 매우 편리하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음에도 아버지는 나를 통해 컴퓨터의 효용성을 적극 인식하시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직접 활용하고자 하는 의지도 나타내셨다. 이후 아버지는 내가 구해 준 컴퓨터로 족보를 정리하시며 본격적으로 한글 등 컴퓨터에 입문하셨다.
그 무렵 아버지로부터 참 많은 전화를 받았다. file이 없어졌다, 작성한 file이 어느 디렉토리에 있는지 모르겠다 등등, 시도 때도 없는 전화를 받았다. 난 제자 아버지의 진전을 기특하게(?) 생각하여 그때그때 궁금증에 답해 드리곤 했었다. 당시 컴퓨터가 영어 약어의 명령어인 DOS시절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컴퓨터와 관련한 아버지의 궁금증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초입 정보화 사회의 도래가 과장되어 언급되었다. 향후 모든 정보는 컴퓨터를 매개로 하여 교류될 것이라 야단법석이었다. 그러기에 컴퓨터를 다룰 줄 알며 이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컴퓨터 식자(識者)층이 우성(優性)존재로 정의되었다.
그리고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면 정보화된 문명사회에서 낙오되는 열등존재로 규정되었다. 이렇듯 컴퓨터 정보활용능력의 유무에 따른 극단적인 Digital divide가 회자되었던 것이다. 특히 컴퓨터 및 정보화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될 유력한 대상으로 고령자, 장애인, 중년 여성 등이 집중 거론되기도 했었다.
이후 10여년이 흐른 지금, 정보화시대의 Digital divide가 과연 유효한 논의였는지 반추해 본다. Digital divide는 컴퓨터의 활용능력 그리고 이에 따른 정보수집능력에 질적 차이가 있음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컴퓨터를 모르더라도 개개인의 정보 수집 능력에는 큰 차이가 없음이 분명한 오늘의 현실이다. 컴퓨터를 통해 모든 정보가 오고가는 급격한 변화도 오지 않았다. 이 분야에 대해 과문(寡聞)한지는 모르겠지만 컴퓨터란 단지 유용한 정보수집의 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리고 가상공간이 아닌 실생활에서의 정보교류가 대세였음은 분명하다.
결국 Digital divide는 우리의 성급한 오두방정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또한 정보매체를 적절히 활용하기 힘들 것이라 예상되었던 여러 취약계층들도 컴퓨터의 유용성을 인식하고 이에 적절히 대처하여 그다지 큰 Digital divide도 나타나지는 않았다. 거의 학교교육을 받지 않았던 아버지가 dir, copy, del, md, cd 등 DOS 명령어를 하나하나 익혀 활용하셨음을 기억한다. 그토록 소망하던 간이족보 제작을 위해 컴퓨터를 익히고자 쉼 없이 노력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컴퓨터는 일부 식자층만이 접근할 수 있는 매체만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개인적 의지에 따라 누구든 활용이 가능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최근 비슷한 맥락에서 새로운 용어가 빈번히 회자되고 있다. 다름 아닌 English divide이다. 영어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인구집단과 그렇지 않은 인구집단을 가르는 또 하나의 분별이다. 우리는 세계화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세계인과의 교류를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인 영어에 의한 소통능력은 분명 중요하다. 한데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능력을 과연 얼마만큼의 인구가 가질 수 있을까? 영어교육의 미래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전망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많은 인구는 아닐 것이다. 영어교육과 관련한 획기적인 전환이 있다 하더라도 영어 의사소통 가능자를 양산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English divide를 하나의 분별 기준으로 채택하고 영어교육에 온갖 노력을 투입하는 작금의 작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영어에 의한 의사소통이 왜 이리 중시되고 있는가? 원론적으로 자라나는 세대를 세계와 교류하는 문화인으로 만들고자 영어를 강조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과연 효과적일까? 영어교육만이 세계적 수준의 문화인을 만드는 적절한 방법인지 생각하게 된다. 사실 영어란 세계적 문화인이 되기 위한 하나의 소통 수단을 가지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우리는 세계적 수준에 적합한 문화인이 되기 위한 내실에 대해서는 무심하면서 그저 수단일 뿐인 영어에 치중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세계적 수준에 적합한 문화인을 만들기 위한 내실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의 소양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나는 인권에 대한 소양을 우선적으로 강조하고자 한다. 이미 우리 주변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많은 노동자들이 이주하여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다수와 구분되는 '우리 아닌 존재'로 규정되어 차별을 받고 있음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렇듯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열등 처우되는 현실이 엄연함에도 영어를 수단으로 하여 세계인과 교류하는 문화인을 기대하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 아닐까? 이들 이주노동자의 인권에 대해 우리 자라나는 세대가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 보다 선행되어야 할 과제는 아닐까?
사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쉽사리 변화되기 힘들 것이다. 성인의 경우에는 오랜 경험을 통해 형성된 인식이기에 단기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자라나는 세대의 경우에는 다르다. 외국인과의 자연스런 교류의 기회를 가진다면 실제 경험으로서 이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형성할 수 있다.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를 진정 세계적 문화인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다양한 세계인에 대한 올바른 인권의식을 가지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영어마을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이보다는 세계 각국의 외국인들과 보다 다양하게 접촉하며, 이들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인권마을을 우선적으로 설치·운영할 것을 제안한다. 인권마을에서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는 세계 각국의 여러 사람들과 흥미로운 경험을 통해 직접적 교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교류로써 보다 큰 우리로 통합되는 의미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권마을은 분명 올바른 인권의식을 갖도록 함으로써 세계인과 교류하는 열린 마음을 갖도록 해줄 것이다. 아울러 어르신, 장애인 또는 우리 사회 소수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병행한다면 그 의미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일체의 Divide는 허구적 단순 사실을 과장하는 극단적 환원(단순화)일 뿐이다. 또한 환원의 결과 이항 대립만이 강조된다. 따라서 분별의 근거인 Divide는 지양(止揚)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맥락에 존재하는 다소간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소통을 활성화하는 지혜가 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윤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