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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복지원로회, "사회복지의 초석, 그들을 기억하자" 공감세미나 개최

기사승인 2022.11.30  16: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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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예용과 황온순 선구자 대상, 제1회 사회복지역사인물 공감세미나 개최

한국사회복지원로회(상임대표 차흥봉)에서는 지난 22일 한국사회복지회관 대회의실에서 ‘사회복지의 초석 그들을 기억하자’라는 주제로 두명의 복지선구자를 대상으로 제1회 사회복지역사인물 공감세미나를 개최했다. 조성철 회장(전 사회복지공제회)의 참석자 소개와 이영분 명예교수(건국대)의 좌장으로 진행되었다. 

첫번째 주제는 ‘마포구를 사회복지의 메카로 만드는데 기여한 전예용’에 관해 김범수 교수(초창기 사회복지인물사 저자, 전 평택대)가 발표를 하였다.

발표자는 왜 “전예용이라고 하는 인물이 마포구를 사회복지의 메카로 만드는데 기여하였을까”라는 문제제기와 함께 전예용은 일제강점기 구호과장을 역임 해방이 되면서 당시 조선구호협회 소유로 되어있던 서대문구 대현동의 임야 11,380평과 가옥 1채의 토지문서를 18년간 보관하고 있다가 1963년 보건사회부에 혜성같이 나타나 문서를 전달하였다.

이 토지문서가 결국 보건사회부, 보건사회부는 다시 사회복지계의 중심단체인 한국사회사업연합회에 전달된 사실을 전했다. 이러한 씨앗자금으로 보건사회부의 승인절차를 받아 구토지를 매각 서울시의 자문을 얻어 공덕동에 330여평의 토지를 구입 8층 사회복지회관을 7년여에 걸쳐 1975년 완공하게 되어 한국사회복지협의회가 현재 공덕동에 사회복지회관의 일부를 협의회 명의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발표되면서 많을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두번째 주제인 ‘한국전쟁중 제주도로 공수한 1천여명의 전쟁고아 어머니 황온순’에 관해서도 김범수 교수가 발표를 이어갔다.

발표자는 황온순은 1951년 1월 한국전쟁당시 1천여명의 고아를 군용기로 제주도로 이동시켰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의 한국보육원 초대원장에 황온순을 임명하면서부터 황온순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황온순은 1903년 황해도 연안에서 출생 솜틀공장을 하고 있는 부친의 교육열에 의거 9세때 서울이화학당에 유학을 오게 된다. 그러나 1918년 9월 황온순이 15세 되던해 부친이 과로로 사망, 모친도 1919년 독립운동때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투옥된다. 이때부터 황온순은 동생 2명의 소녀가장이 되어 만주에서 2년 다시 서울로 와서 학업을 하는 동안 많은 고통의 시간이 계속된다.

해방이후 보육시설을 운영하던 황온순은 1950년 유니세프 지원 장학금으로 영국에 연수하는 동안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듣는다. 영국에 있는 동안 매일밤 악몽에 시달려 불안한 마음도 들어 11월 귀국 아들을 수소문해 찾았으나 아들이 경기도 양주에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낙심하고 있었다. 이럴 때 이승만 대통령은 황온순을 위로하고 동시에 ‘제주도로 공수한 1천여명의 아동을 돌봐주구려’라는 메시지와 함께 사회복지계에 크게 알려지기 시작한다.

또한 황온순은 1961년 한국사회사업연합회의 5대 회장으로 여성최초로 회장에 취임하게 된다, 기독교인이었던 황온순은 1930년대 중반 금강산에 갔다가 원불교에 심취 개종하게되어 종사(출가위)까지 호칭되는 단계로 까지 오르게 된다.

김정자 전 정무제2차관은 마지막 좌장으로 오늘은 마포구가 사회복지계의 메카가 되는데 기여한 두인물 한분은 전예용, 또 한분은 사회사업연합회의 5대회장을 역임한 황온순 선생님에 대한 발표로 두분의 삶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는 시간이 되었다는 의견과 함께 세미나는 종료되었다. 

김희라 기자 heera2939@naver.com

<저작권자 © 복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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